[연재소설 19로탄] 7회/ 1장 흑석령(黑石嶺) (7)
[연재소설 19로탄] 7회/ 1장 흑석령(黑石嶺) (7)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4.14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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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바람은 매섭고도 차가웠다. 지는 달빛은 희미했고 가야할 길은 엄혹했다.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길채비는 이불 한 채, 반팔 덧저고리 하나, 두루마리 한 벌, 칠서 운고책이 한권씩. 그리고 비옷과 요강 동전 육백립이 전부였다. (猛風票熱 殘月熹微 嚴程促迫 行色悽凉 行李則一衾一半臂一周衣七書正文七卷 讀冊一卷 銅葉六百虎子 一及雨具) - 김려 일기.

경기감영에서 유배 신고를 하고 곧바로 유배지로 나선 길의 날씨는 매섭기 그지 없었다. 호송을 맡은 나졸들은 김려의 행장을 보고 실망의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며 닥달을 했다. 말도 없이 순전히 도보로 가야하는 경원길은 삼천리였다. 그 멀고먼 길에 나선 길은 유배장에게도 고통이지만 호송자들도 고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주 철원 원산 함흥 부령 경성으로 향하는 길은, 산과 산의 협곡과 바다를 끼고 한달을 가야 하는 고행길이었다.

"이런 젠장헐...영락없는 걸뱅일세."

"누가 아니라나. 길에서 굶어죽겠군."

나졸들은 가난한 김려의 유배길 행장을 보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살림이 넉넉한 유배객을 만나면 유뱃길에서 술과 밥을 잘 대접받고 용채까지 두둑하게 챙기던 그들인지라 용채는 고사하고 보태줘야 할 형편을 보고 입맛이 쓴 모양이었다.

"휴...!"

김려는 한숨만 나왔다. 나졸들의 불평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는 늙은 노모와 시집을 가지 못한 여동생들 그리고 어젯밤에 딸 아이를 해산한 아내가 있었다. 갓 태어난 딸 아이의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유뱃길에 오른 입장에서 나졸들의 불평은 한가한 것이었다.

동대문을 나와 북쪽으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오후 늦게 도착한 곳이 양주였다. 일행은 양주의 한 역(驛)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여기서 나가시오? 나가라니까?"

"날이 저물었으니 역참에서 하루 쉬고 갑시다."

"태평한 소리 말고 어서 떠나시오? 이곳에서는 절대 쉴 수 없소."

역참에 나와 있던 양주관아의 아전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포천 경계까지 일행을 밀어냈다. 등에 채찍만 가하지 않을 뿐 사람대접이 말이 아니었다. 김려는 양주 목사에 분노가 치밀었다. 양주 목사는 오정원(吳鼎源)이었다.

"목사의 지시요?"

김려가 아전들에게 물었다.

"왜? 목사의 지시라면 욕이라도 해 주시게?"

"끄응."

김려는 입을 다물었다. 상종할 수 없는 인사들이었다. 오정원은 김려도 조금 아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같은 동리에 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정원은 안면몰수하고 나왔다. 강이천사건의 여파가 그만큼 큰 것이었다. 서학을 벌레 보듯하는 관원이 많았던 탓도 있었다.

"나으리 등짐 제게 주시죠?"

위서방이 김려가 등에 진 바둑판을 자기에게 달라고 말했다. 유뱃길에 오른 죄인(?)이라지만 양반이자 유생인 주인에게 짐을 지운다는 것은 노복으로 불충이라 할 수 있었다.

'됐네. 이 정도는 나도 나눠져야지. 그리고 이건..."

김려는 뜨거운 입김을 몰아쉬며 스스로 다짐을 두었다. 자신이 등에 진 바둑판은 군왕이 기명(碁銘)을 내어 친필로 써준 물건이었다. 그것은 유뱃길에 오른 한 인간이 나라의 지존과 연결된 접점이자 희망이었다.

"사태가 그리된 것이지... 성상께서 곧 부르시겠지...?"

김려는 바둑판을 들고 입궐하라던 군왕의 지음이 아직도 가슴속에 뜨겁게 살아있음을 느끼며 스스로를 위로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조금만 도성을 떠나 있으라는 군왕의 배려로 생각한 때문이다. 양주 아전들의 닥달은 포천관아 지역에서도 계속되었다. 포천군수도 김려를 반기지 않았다. 서학이 죄악이던 시대 김려도 영락없이 서학쟁이가 되어 있었다. 포천길은 한밤중의 행군이었다. 포천관아의 아전들도 양주 아전들과 비슷했다. 그들은 위서방의 행랑에서 엽전을 갈취하기까지 하는 행패를 부렸다.


김려의 유배령은 양주에서부터 경원 노상에 있는 모든 관아에 조보(朝報)와 '통고'로 알려져 있었다. 김려 일행이 지나가는 관장은 곧바로 도착과 출발을 형조에 보고 해야 했기에 유뱃길은 거울로 비추듯 생생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지방 관장들이 서학을 탄압하는 것은 국법을 따르는 것이어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김려는 법 이전에 인정이 아쉬웠다. 그것이 세상인심이기도 했다.

"이곳이 영평현이오."

포천 아전들이 영평현 경계에 도착하자 철수를 하며 말했다. 조그만 개울을 하나 사이로 주막이 있는데 그 주막 앞에 영평관아의 아전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 속에 키가 크고 도포를 입은 걸걸한 사내가 보였다.

"오?"

김려는 그를 보고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그 사람은 영평현감 '박제가(朴齊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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