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 8회/ 2장 정조의 바둑판 (1)
[연재소설 19로탄] 8회/ 2장 정조의 바둑판 (1)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4.15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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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무심천변이다. 김산(金山)은 매주 월요일이면 청주에 와 무심천변을 걸어 강의가 있는 학교로 향한다. 버스로 두 시간을 와 30분쯤 시내를 걸어가면 그가 매주 3시간씩 강의를 하고 있는 학교가 있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다시 인근 대전으로 가 찜방에서 하루를 유하고 그곳에 있는 대학에서 두 시간을 더 강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벌써 8년째 반복되는 시간, 캠퍼스에 서 있는 아름드리 나뭇잎에 신록이 내려 또 한번 여름에서 가을이라는 시간의 순환을 앞두고 있다.

수업 5분전, 학과 사무실에 강의 채크를 하고 강의실로 들어선다. 3학년 20여 명의 예비 국사교사(?)들의 눈망울과 마주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나는 칠판 위에 '정조는 누구인가'라 쓴다. 학생들은 지난주 나눠준 자료를 책상 위에 내놓고 있다.

(산업과 경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보잘 것 없던 조선이고 보면 정조의 시대를 딱히 다른 군왕과 비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다만 정조시대의 산업과 경제는 다른 군왕 때보다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조선의 산업과 경제는 언제나 곤궁했다.

그렇다면 정조시대의 정치는 정상적이었던 것일까. 역사가들은 이 물음에 수긍하지 않는다. 그들의 연구는 입만 열면 노론, 소론, 남인, 벽파, 시파 운운하며 정조시대를 재단하기 바쁘다. 정조시대에도 엄혹한 정치적 갈등은 여전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조는 조선을 이끈 개혁군주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이란 것이다.

강의자는 많은 자료와 학자들이 내놓은 정조연구의 단편적 자료 속에서 정조의 독존과 혼자 잘난 맛에 사는 개성에 놀랐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으로 군림하려한 정조의 선민의식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정조는 당시대 사림의 영수이자 송시열의 현손인 '송명흠'을 불러 몇 마디 담소를 나누고는 별볼일 없는 인사라 말한다. 당대의 학자를 대놓고 절딴내어 상대적으로 자신의 학문을 높이는 정조의 일갈(?)은 보는 이를 멋쩍게 한다.

정조는 늘 이런 식이다. 스스로 '당송백선'이란 시집을 편찬하고 그 책에 수록된 일부 함량미달의 시를 지적하는 규장각 각신들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열변을 토하며 난리를 치기도 한다. 자신의 문학적 심미안을 믿은것이다. 정조시대 정조의 반대파는 다수였고 정조의 지원파는 소수였다. 강의자는 이런 현상이 지속된 것은 바로 정조의 이상성격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정조는 기본적으로 선량했고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눈물도 많고 사랑도 많은, 한마디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정조는 이 강점 많은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도 준다. 정조에게 감동을 받은 사람이 정약용이다. 또 한 사람을 거론하라면 김조순일 것이다.

정약용과 김조순은 비슷한 연배로 정조에게 똑같은 사랑을 받았으나 삶은 극과 극이다. 정약용과 김조순의 저술 속에 정조는 꿈과 같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꿈속에서 죽은 정조를 보고 감동하고 눈물짓는 대목을 표현한 글을 여러 편 남긴다.

정조는 수십 명의 인재를 선별(정조만의 시각에서),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서용보다. 황해도 서북지방에 여러번 암행어사로 거론된 사람이기도 하다. 서용보는 순조말기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한 성공한 관료다. 정양용과도 각신시절 친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부음을 받고 궁으로 들어오다 길에서 조득영을 만나 서로 껴안고 울었다는 기록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각신들과는 보편적으로 친했다.

이 서용보의 행보를 보면 정조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한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서용보는 정조가 죽자 곧바로 정조의 생전사업을 거스르는 일에 앞장을 선다. 그건 정조가 키운 각신들 대분분의 행동이기도 하다. 오랜 유배지에서 돌아와 복귀를 노리던 정약용의 재등용을 끝까지 막아선 사람이 서용보다.

이런 일연의 현상을 보면 정조가 생전에 펼쳤던 중요사업들이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가를 알 수 있다. 장용영의 철폐, 화성건설 이후 활용가치의 논의중단, 규장각의 효용성의 재고 등에서 정조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수십 명의 각신들 중에서 목숨걸고 반대를 했던 인물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김산은 학생들의 반응을 살핀다. 달리 반응(?)이 있을 리 없다. 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겠다고 입학한 지방대학의 역사학과의 강의 풍경은 이리도 한가하다.

"나의 정조평에 반론을 생각한 학생 없나? 정조는 역사학도는 물론 전국민이 알고 있는 성군이다. 여러분은 드라마도 안보나?"

김산은 얼마전에 끝난 드라마 '이산'을 떠올리며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학생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강의만 있고 질문이 없는 학습이 만들어낸 한국 강단의 진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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