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 22회/ 4장 18세기에서 온 편지 (1)
[연재소설 19로탄] 22회/ 4장 18세기에서 온 편지 (1)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5.06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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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정이 없다. 무정한 시간을 빌려 나를 살고 가정을 사는 소시민들의 발걸음은 언제나 분주 하고 바쁘다. 김산의 시간도 그랬다. 청주 대전을 경유하여 다시 서울로 상경하는 일주일 사이클에 편승하여 대전에 있는 대학의 강의실에 서 있다.

강의실 안은 한가하다. 칠판 위에는 '홍제전서'의 서문이 원문으로 써 있다. 정조가 혼신을 기울여 자신의 재위기간에 완간을 한 '거질' 홍제전서의 출판을 기념하며 쓰 자서(自書)다.


- 이 속에 나의 정신이 담박하게 들어 있다. 비록 유학의 도통의 정수와는 견주기 힘들더라도 경서를 씨줄로 삼고 역사를 날줄로 삼아 복희부터 신농, 요, 순, 우, 탕, 문왕, 공자, 맹자, 주자까지 모든 것을 섭렵했으니 묻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내가 만천명월의 주인임을. (주1. 홍제전서 서문)

"어떤가? 여러분이 좋아하던 드리마 이산과 실제의 이산의 모습이 괴리가 있지 않은가?"

"... ..?"

김산의 강의는 늘상 이런 식이다. 이상 속의 역사와 사실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간격에 끝없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김산의 역사공부의 방식이기에 강의법도 비슷하다.

정조는 말한다. 자신의 저작물이 요순우탕으로 이어온 동양의 사상과 철학의 바로미터라고...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당금 시대의 문화의 등대라고.

"만천명월의 주인이 무슨 뜻인가요?"

학생 하나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물었다. 기초 한자 수백 자도 모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기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깊이 있는 역사공부는 꿈에 불과할 것이다.

"만 개의 강과 내를 비추는 달의 주인이란 의미다. 정조 자신이 그런 사람이란 말이지."

"어버이 수령이시네요?"

"와 하하하."

다른 학생의 썰렁한 농담에 학생들 모두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다. 정조는 어버이 수령이었다."

"... ...?"

김산이 썰렁한 학생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학생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정조는 실제로 그랬다. 만백성의 아버지이자 모든 신하의 스승이며 조선군대의 총수였다. 군주였기에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이것에서 한 발짝 더 나간다. 공자, 맹자, 주자, 율곡 이이로 이어져온 조선유학의 본령의 영수, 곧 조선 사상의 지도자인 산림의 영수를 자처한다. 정조의 이런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학생들은 이상하다 생각지 않나?"

"... ...?"

"정조 당시에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김종수, 심환지가 그들이다. 이 두 사람은 정조 재위기간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대표한 노론당의 대표다. 이 두 사람이 정조에게 이렇게 물었다."

김산은 이 대목에서 말을 끊고 칠판에 썼다.

-도대체 전하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조선실록 -김종수 심환지)

"정말 저렇게 물었다는 겁니까?"

"신하가 임금에게 대놓고요?"

학생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기록이자 사실이다. 일국의 군왕에게 대놓고 정체성을 묻는 이 두 사람을 보노라면 군왕과 신하라는 시대의 소명을 자각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이 자유한 21세기 정치사 속에서 대통령의 면전에서 저런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을까.

주1. 홍제전서 서문. 惟予專情覃思之所溱泊 蜼不敢據 擬於道通之耘 若其經經緯史 窃自有得乎 熹農堯舜禹湯文武孔孟朱之緖余者 尙亦不問 可知爲萬川明月主人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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