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서천군 마서면 당선리(堂仙里)
[지명유래] 서천군 마서면 당선리(堂仙里)
  • 류신 기자
  • 승인 2021.06.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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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리는 백제 때 설림군이었다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서림군 소속이었고, 조선 초에 서천군에 속했던 지역이다. 조선 말 서천군 마길면의 지역으로 마을 뒤에 당산이 있다 해서 당산 또는 당선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쌍현리, 신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당선리라 해서 마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서천군 마서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선리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을 중뜸이라 하고, 중뜸 서쪽에 있는 지역을 서뜸이라 한다. 또한 중뜸 동쪽에 있는 마을을 동뜸이라 한다. 당산 남쪽에 두못치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에 마을 앞에 연못 두개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쌍연 또는 쌍연리라고도 한다.
두못치 북쪽에 있는 지역을 당선이라 하는데, 이 마을의 이름을 갖게 한 지역으로 마을 뒤에 당산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리는 두못치 동북쪽에 자리 잡은 새로 된 마을이며, 새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못치 서쪽 산 너머에 있는 지역은 재너머라 한다. 장선리는 마을에서 조사된 유적은 없지만 옆 마을인 도삼리, 가까운 송내리 에도 테뫼식 토축산성 등 주변에 여러 유적과 유물이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큰 마을이다. 특히 금강과 접하고 있는 마을로 이 일대는 진포대첩의 현장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즉 금강하구의 지리 조건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380년(우왕 6) 8월 왜선 5백척이 진포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나세 장군이 심덕부 등과함께 최문선이 만든 화포를 이용하여 모두 수장시킨 진포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마을 뒷산에는1996년 건립한 대첩비가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쌍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서천군 방리조에 의하면 쌍연리는 남마길면에 속한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으며 호수는 76호, 남자 120명, 여자 80명(雙淵里 自官門南距二十里 編戶七十六戶 男一百二十口女八十口)이 살고 있던 매우 큰 마을이었다. 호수와 인구 규모로 볼 때 지금 당시 쌍연리는 지금의 당선, 안골 등 일대를 포함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선리는 단양 우씨가 동족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었다. 처음 단양 우씨가 당선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봉신(奉申)으로 충북에서 필상(筆商)으로 입향하면서 부터라고 전해지지만 쌍연에 밀양 손씨가 살고 있어 봉신의 아들인 만업(萬業, 1678년 생)이 마을에 살고 있던 밀양 손씨와 혼인하면서 처가와의 인연으로 살기 시작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정착 후 우씨들은 인동에서 옥남리와 추씨와 더불어 부자로 유명하였다. 서천군내는 물론 부여, 보령 등지에 토지가 많아서 도지가 수천석에 이르렀다고 전하는데 보령, 부여 등의 도지는 배로 실어 마을로 날랐다고 한다. 또한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는 안면도에서 운반하여 사용하였고 일꾼들에게 소를 잡아 먹일 정도였다고 한다. 후손 중 막대한 부를 소유했던 우종림(鐘林, 1857~1935)은 선원전 참봉을 지냈는데, 재산을 내어 군민을 진휼하여 군인들이 송덕비를 세웠고, 아들 동제(東濟, 1887~1940)도 면장을 지냈는데 그때 세운 공으로 불망비가 세워졌다. 1935년 2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서천 마동면장 우동계(禹東溪)가 청년훈련소에 천원을 기부했다고 보도 했는데, 면장을 지낸 점이나 단양 우씨 제(濟)자 항렬을 고려하면 우동제의 오기로 추정된다. 마을에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전참봉우종림청덕비(前參奉禹鐘林淸德碑, 1928년), 전참봉공우종림시혜구활비(前參奉公禹鐘林施惠救活碑, 1932년), 고면장우공동제송덕불망비(故面長禹公東濟頌德不忘碑, 1944년)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에는 단양 우씨 제실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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