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마을이야기] 광천읍 가정마을(2)
[홍성군마을이야기] 광천읍 가정마을(2)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09.0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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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이 널어 있는 마당
알곡이 널어 있는 마당

 

  99세 박옥순 할머니의 가정마을살이
  올해 99세인 박옥순 할머니는 보령 천북면에서 열여덟에 시집을 와 마을살이를 시작했다. 아들 둘을 낳고 평생을 가정마을에서 살았다. 웃음과 눈물, 기쁨, 갖가지 감정들로 이루어진 박옥순 할머니의 기나긴 시간들을 만났다. 
  “가정마을에 처음 오셨을 때 어떠셨어요?”
  잠시 그때를 회상하는 듯 생각에 잠긴 박옥순 할머니의 표정은 어떠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뗀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따듯하고 먹먹하게 만들었다. 박옥순 할머니는 많고 많은 일들 중 어떤 이야기가 가슴속에 남아 있던 것일까.
  “시골... 얼매나 그렇게 힘든지.
  그래두 여기 와서..
  이건 안 잊어번져.”
  그 시절 그렇게 맛있었던 무죽 이야기
  “음슥(음식)도 못 묵고 쟁일 일 하고 나니께.. 무죽 좀 쑤라고 하드라고. 무죽이 믄지를 물르겄어. 당최. 물른다고 혀면 넘부끄러우니께 물른다고도 모더구. 그리서 형님헌티 나는 안 혀봐서 모더니께 형님이 안쳐만 주유. 한 번 안쳐주면 다음번에 지가 할게유.. 그러니께 안쳐 주는데, 무수만 잔뜩 이렇게 잘르서 쌀은 이렇게 째끔 넣구 저녁을 쒔는디. 점심도 못 먹구 있다가 먹으니께 그런가 그게 그렇게 맛나데.. 하하. 나 그건 안 잊어번지네. 그건 안 잊어번져..” 
  눈물을 훔치신 시아버지 이야기
  “난 젊었을 때 양할아버지 뫼시고 살었어. 가정리에 딸만 일곱을 난 할아버지가 있었는디, 그때는 양자를 많이 혀서 시아버지가 그 할아버지 양자로 들어갔거든. 근디 뜻이 안 맞으서 못 살겄다구 도로 집이로 왔어. 대신 큰아덜 부부를 양 할아버지한테 보냈는디, 그 사람들도 못 살겄다고 도로 왔더라고. 큰매느리는 친정으로 가뻐려서 데려오고 그랬어.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 짐꾼 몇 데리꼬 와서 내 이불, 내가 시집올 때 해갖고 온 거 다 짊어지고 양 할아버지 네로 가뻐렸네. 노인네 구신(귀신)처럼 그러커고 있으면 넘 흉보지 않느냐고. 살믄 살지 왜 못 사느냐고. 나는 싫은데 별 수가 있나. 내 물건을 다른 건 다 가져왔는디, 저 굴뚝 모탱이다 시아버지 뵐까 미서워서 치워 둔 요강은 안 갖고 왔드라고. 시아버지는 그걸 봤나 봐. 그날 해떨어질라 하니께 요강을 보재기다 싸서 들고서 왔더라고. 살곰살곰 불러서 내 손이다 내 요강을 쥐어주면서 너도 알지. 난 거기 들어가기도 싫어. 니 냄편 바라고 시집온 건디 그 님이 갔으니 너 혼자 우리집이서 살겄니. 따라가서 고상을 해도 허고 호강을 해도 허야지. 이거 갖고 들어가라고 요강을 내 손에다 쥐어 주대. 그리고 울으믄서 가시드라고. 울믄서. 나 고상길로 보내는 생각헌께 기가 맥힌다고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가시드라고...” 
  오른쪽 눈망울에 걸쳐 있던 눈물은 박옥순 할머니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짐작게 했다. 때론 눈물을 타고 흘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기에 집안에서 예쁨도 많이 받았다. 잘 살아온 값진 인생이었다.
  박옥순 할머니는 말씀하시는 중간중간 자식 자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우리 아들들 참 착해.
  이런 효자가 없어. 그치?”

1970년대 가정마을 전경
1970년대 가정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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