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完浦里)
[지명유래]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完浦里)
  • 류신 기자
  • 승인 2021.09.0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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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넓은 농토로 변하여 맛좋은 화양쌀을 생산하고 있는 완포리는 백제시대와 신라시대 가림군의 영현인 마산현 소속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임천의 한산현 소속이었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13)에는 한산군에 속했고, 조선 말엽 한산군 남하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완길리, 기포리의 이름을 따서 완포리라 하여 서천군 화양면에 편입되었다.

완포리는 거름개라고도 하는데, 옛날부터 간조의 차가 심해서 바닷물의 변동이 많은 금강 가에 위치한 마을로 게가 많은 펄 땅 근처에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뱃사람들의 곶이 표적이 되는 마을이라 기포(岐浦), 또는 기포리 라고 불렀다 한다. 이곳에는 거름개나루라 지칭하는 나루가 있어 전라도 등 외지 손님을 실어 날랐다. 거름개 북쪽의 마을을 완길, 괴룰이라고 부르며, 서쪽에 있는 지역을 보강, 보반굴이라 부르는데, 전체적으로 괴룰, 보방굴, 동아시, 하느물, 도란물 등으로 부르는 5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을 끼고 마을 한 켠에 안산이 있는데, 그 산에 오르면 전라도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70년대에 故김지열 씨가 무성한 갈밭을 개간해서 마을 주민들에게 싸게 분양하여 지금은 경지면적이 25만평 정도에 이르며, 마을 곁에 공동묘지가 있어 주변 마을에서 많이 이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역사적 인물인 권변(權忭)의 출생지이기도 한데, 수초당 권변은 벼슬길에 오르느니 차라리 벼슬을 버림으로써 백성의 길을 따라가야겠다는 신념에 어떤 이유에 대한 변명도 없이 스스로 병풍에 가려 그 숱한 부름도 사양하고 고고하게 살다간 선비이다.

권변은 1651년(효종 2) 완포리에서 양촌 권근의 후손 지족당 권양의 맏아들로 태어나 주위에서 신망을 받았다. 1663년(현종 4) 13세에 한산군의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당시 한산군수의 사위가 되었다. 1674년 이후에 서울에 머물며 정치권력을 둘러싼 당쟁으로 인해 우암 송시열 등이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폐거할 것을 결심했으나 선고의 명으로 1681년(숙종 7) 사마양시(전사와 생원 시험)에 응시 장원으로 통과했다. 1689년(숙종 15) 4월에는 증광전시(나라에 경사가 있어 왕이 친히 임한 운데 시행하는 병과)에 급제했다. 이때 공은 나라에서 증광사를 베푼 뜻을 모르다가 장소의를 희빈으로 봉하고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은 강직하고 불의를 모르는 성격으로 과거 급제자에게 교지를 교부하던 날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당일로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 하였다. 당시 급제자는 18명이었는데 17명은 인현왕후가 복위 된 후 삭과(削科) 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년에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강원설서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문을 올려 벼슬을 내놓았지만 임금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수십 차례 벼슬을 임명받았으나 끝내 거절하자 숙종이 친히 국문하기도 했다. 공은 전원에서 쓸쓸하게 살아온 바를 자술한 한거언지서(閒居言志序)를 쓰기도 했다. 1725년(영조 원년) 풍환에 들어 다음해 숨을 거뒀는데, 공의 부음이 전해지자 조객들이 슬퍼하며 그 이어지는 길이가 10리에 달했다 한다. 그는 왕명에 의해 변품과 증직이 내려져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으로 추증되었다. 당시 왕으로부터 시호가 내려졌는데, 글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썼다 하여 문(文)이라 하고, 청렴결백하고 언행을 조심하여 지켰다 하여 정(貞)이라는 뜻을 담아 문정(文貞)이라 정했다.

공은 화양면 완포리 향현사에 봉향되었는데, 사원이 철폐됨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89년 아우제월제 권성을 봉향하던 기산면 화산리 화산사에 추향케 되었으며, 그 후 화산사는 화산서원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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