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마을이야기] 구항면 황곡리 하대마을(1)
[홍성군 마을이야기] 구항면 황곡리 하대마을(1)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09.1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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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돌

하대마을에는 조금 특이하게 생긴 돌들이 있습니다. 바로 ‘선돌’과 ‘들돌’입니다. 선돌은 사람이 서있는 것처럼 길쭉한 모양으로 땅 깊숙이 뿌리박혀 있고, 들돌은 동그란 바둑알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돌들이 더 특별한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내려져온 돌이라는 점인데요. 워낙 오래전부터 있었던 터라 그 기원과 유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입말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전설과 이야기들이 조금은 남아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음력 2월 초하룻날 자정이 되면, 마을에서 선돌과 들돌에 제사를 지내는 ‘들돌제’라는 행사를 매년 이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행사 또한 두 돌이 존재해왔던 시간만큼이나 아주 오래된 역사를 품으며 지속되어왔다고 합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지요. 하대마을 남자 주민들은 어릴 적부터 들돌제에 쭉 참여해왔고, 이 제사를 잘 치르면 마을에 안 좋은 일 없이 한 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이렇듯 마을역사의 뿌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선돌과 들돌, 들돌제 이야기에 관한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를 모아봤습니다.
  “선돌은 남자 돌, 들돌은 여자 돌이지”
  “선돌은 남자고 들돌은 여자 돌이여. 마을 입구에 들어오다 보믄 선돌이 있고, 거기서 또 더 들어오믄 들돌이 있는데, 옛날 얘기를 따지믄 처녀 장사가 있었어. 그놈(들돌)을 맨날 들고 운동을 하다가, 옛날엔 댕기가 있으니까 그놈을 들다가 댕기가 밻혀서 죽었댜. 그러고 고 앞에 남자 장사가 있었는디, 총각 장사가 있었는데 따지믄 처녀 장사가 죽으니께 따라서 죽었댜. 요샛말로 그러니까 연애를 했던 건지 사모했든지 간에 여자가 죽으니 남자가 속상해서 죽었다는겨. 그래서 2월 초하룻날, 음력으로다가(제사를 지낸다), 잉?”
  “내가 한 번은 뭐야, 내가 이장 볼 적이거든? 누가 와서 물어볼 적이 얼마나 나가는지 재보자고, 그럼 저울이 있더라고. 그놈을(들돌)을 끌어다가 재보자고 했더니 178근 나가더라고.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고런 돌이 우리나라에 한 너댓 개 정도 된댜. 그런데 원래는 180근이었는데 하도 닳아서 인저 178근 배께(밖에) 안 나가는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허더라고.
  그래서 그전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2월 초하룻날 되믄 그놈을 들고 대니고 막 그랬었거든? 돌이 이렇게 네모번듯허고 허믄 번쩍번쩍 들 테지만서도 뺀질뺀질허고 땡그래가지고 집을 데가 읎어. 기술도 있어야 하고 그거 드는 사람들은 힘이 세다, 그래서 심(힘)자랑도 허고 그랬었지. 드는 사람도 흔치 않더라구.”
  “들돌 그렇게 들기 어렵다더라고”
  “들돌에 대한 어른들 얘기가 있더라고. 들돌 들고 내기들 헐 때 그전에 그걸 들다가 미끄러져서, 댕기를 밟아서 안고 죽었다는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 우리네 어른들도 힘겨루기 하기 위해서 많이 들었지. 우리 동네 지금 생존해신 분들도 그거 들은 분들 있는데.”
  “제주 되믄 몸과 마음을 깨끗허게 잘해야지”
  “그전에 이걸(들돌제) 원래는 낮이 했었어, 낮이. 인저 일제 강점기 때 못허게 허잖아, 일본 사람들이. 못허게 하니까 몰래 허느라고 새벽에 했지. 지금으로 말하면 한 오전 5시나 이럴 때. 이제 낮이 해도 상관없는디 그냥 순리대로 아직까지 밤에 허데요.
  옛날에는 음력 정월 보름날 농악 치고 대니면서 근립(건립)헌다고, 말하자면 제사 지내는 거 경비 쓰기 위해서 걷었거든. 집집마다 대니면서 인저 집에서 자기 성의대로 쌀 한 되, 두 되 냈었어, 그땐. 그렇게 자기 마음 있는 대로 쌀 한 자루 내놔서 걷어가지고 그걸로 제물 준비허고 그걸로 떡도 했어, 무리떡.”
  “또 제사 지내기 며칠 전에 제주 할 남자 허고 음식 차릴 여자를 정해. 그 사람들은 며칠 전부텀 가족들도 몸을 깨끗허게 잘해야지. 목욕재계도 허고 피도 안 봐야 되고. 만약 내가 어디 가는디, 동물이 어디서 죽어있다 그러믄 일루 가지 말고 절루 가고. 보지 않을라고(웃음). 옛날엔 그렇게 혔어.
  인저 지금은 마을회관이 있어서 거기서 출발도 허고 거기서 음식도 먹지만, 예전에는 제주 된 사람 집에서 출발했거든. 출발해서 저 밑에 내려가 선돌 가서 먼저 제 지내고, 또 들돌에 제 지내고. 제 끝나믄 인저 차림집에서 막걸리 술도 먹고 떡도 먹고 그랬었지. 그때 마을 사람들 모이니까 대동회의 같은 것도 허고.”
  “들돌제 덕분인지 마을이 평안한 것 같어”
  “그전서부텀 내려온 풍습이라, 우리 세대에서 뭐 안 할라고도 않고 계속해 내려온 거니께. 정월 그믐날은 동네 분들 허고 그 제주, 제사 지낼 사람은 목욕허고 회관서 딱 있지. 있다가니 자정되면은 그때 제사를 모시지. 지사(제사) 모시고, 그러고 인제 가지. 2월 초하룻날은 음식 나눠먹고, 거기서 하루 또 노는겨. 제주는 그전부텀 딴 데 안 대니고, 보기 싫은 거 안 볼라고, 집이서만 있고 그러다가니 제사 모시는 거지.
  나도 몇 번 했지. (제주가 되면)아무래도 부담시럽지, 그것도. 그 제사 잘 못 모시고 오면은 동네가 무슨 일 있고 허면은 제사를 잘못 지내서 또 이런 일이 있다고 그런 얘기도 허고... 그때는 잘들 모실라고 해요, 사람들이 챙기고. 그래서 그런지 뭐 동네 그냥저냥 편안하게 지내고 그러니께.”
  들돌제 지내는 순서
  [마을회관 → 선돌 → 들돌 → 마을회관]
  음력 1월 31일 밤에 마을회관에 모여 그 해에 음식 차리는 일을 맡은 사람이 부엌에서 제물을 준비한다. 음식 준비가 끝나고 자정이 되면, 제주의 주도로 마을회관에서 먼저 절을 올린 다음, 선돌 앞으로 가서 제주가 축문을 읽고 절을 하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한다. 이와 같은 순서로 들돌에 가서 한 번 더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잠시 쉬었다가, 아침에 마을회관으로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윷놀이 등을 하며 함께 논다. 
  들돌제 때마다 항상 들었던 용대기
  광서 8년(1882년)에 만들어진 하대마을 용대기는 음력 정월대보름부터 2월 초하룻날까지, 들돌제 기간 동안 늘 동네 한가운데 세워두었던 중요한 물건이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특별한 시기였기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 세워두었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겪어온 탓인지 많이 헤지고 닳았다. 지금은 들돌제 때 용대기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마을의 뜻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물건으로 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용대기에 그려진 용 그림은 옛날에 마을 근처를 지나가던 한 스님이 엽전을 녹여, 그 물로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대기
용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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