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마을 이야기] 구항면 황곡리 하대마을(3)
[홍성군 마을 이야기] 구항면 황곡리 하대마을(3)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09.1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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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할아버지 이야기

  “잉, 내가 나이가 제일 많댜”
  멋쟁이 농사꾼 조병국 할아버지
  마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걸으면, 왼편에 아담한 벽돌집 한 채가 보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집을 마을의 첫 집이라고 부르는데요. 주변에 새로운 집들이 생겨 그 경계가 희미해졌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 그대로 터를 잡고 있는 이 집은 여전히 마을의 첫 집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남자 어르신들 중에서 최고령인 조병국(87) 할아버지와 아내 정귀섭(86) 할머니가 날마다 집 앞에 있는 밭을 함께 일구며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조병국 할아버지는 가장 큰 변화를 맞이했던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이장직을 맡기도 해서 하대마을이 거쳐 온 역사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른 오후, 밭둑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나누었던 짧은 담소를 정리하여 실어봅니다.
  * 하대마을에는 최고령 할아버지 한 분, 최고령 할머니 두 분이 계십니다. 처음에는 마을의 최고령 할아버지, 할머니 특집으로 글을 기획했으나, 그중에서 인터뷰가 가능했던 조병국 할아버지 이야기를 싣게 되었습니다.
  객지를 꿈꾸던 토박이
  “밖에 한번 안 나가고 여기서 쭉 살았쥬. 나도 나갈라고 하다가 1946년돈가? 그때 호국군 창설하는디 들어갔거든. 47년도에 1년 훈련을 받았어, 면에서. 면에서 1개 소대, 한 30여 명, 호국군이라고... 그런 게 있어서 그때 내가 49년도 군대 갔어. 49년도에 내가 18살이었어. 그래가지고서 군대에서 5년 있다가 53년도 휴전됐지? 53년도 7월 휴전됐는디 8월 달에 제대시키데? 그 후로 (객지로)나갈라고 했었는디 어머니도 육십 넘은 노인이고, 애들이 그때 둘인가 있었어. 그래도 다른 사람들 그때 막 나갔었거든? 근디 옛날부텀 소도 언덕이 있으야 비빈다고, 그래도 무슨 요고만치라도 연고되는 디가 있으믄 갔을 텐디 연고되는 디도 읎고. 마음은 나가고 싶은디 못 나갔지. 그래서 연태 살은 거여.”
  군대를 제대한 1953년 그해 겨울, 스물세 살이었던 조병국 할아버지는 은하면이 고향인 정귀섭 할머니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마을에 트럭 운전수로 일을 하던 분이 있어서 그 트럭을 빌려 할머니를 모셔왔다고. 이후 딸 셋, 아들 둘 낳아 오 남매를 훌륭하게 잘 키워오며 평생 희로애락을 나누어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가장 큰 조력자이자, 가장 어려운 시절을 함께 헤쳐 나온 동반자다. 평생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지 웃는 모습마저 닮은 조병국 할아버지와 정귀섭 할머니가 사진기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다.
  70년대 이장님
  “나 이장일 때 이거(농로 내는 일) 했지. 새마을운동이 70년 초여. 그때 했어, 그때 했지. 이거(농로 내는 일) 하고서 2년 봤거든. 이거 허고서 그만뒀어. 지끔은 다 즈기 돈 주고 토지를 매입허지만, 그때는 토지 있남? 70년도 초반이니까 그냥 공짜로 내놨지. 그걸 인저 토지 지주가 안 내놓을라 허고 이장이나 추진허는 사람들은... 이장뿐만 아니여. 면장도 욕보고 다 욕봤어, 그때. 당시는 이런 (논둑이나 밭둑 같은)흙길이었지. 그런디 (폭이)5메타를 농로라 했어. 여기서부텀 즈 위까지 (길이가)1000메탄가? 1000메타일겨. 그걸 농로로 헌다고 5메타로 했거든. 그때 면에서 시범마을이라고 9개 마을 지정했을 때, 9개 마을 워디... 워딘지 기억이 잘 안 나는디 우리가 거기 해당됐거든? 시범부락으로. 그때 도지사가 구항 와본다고... 도지사도 한번 들린 적 있었을겨. 그때 얘기허믄... 아이고, 그때 저거 하는디 고생 많이 혔지. 일허는 사람은 어렵게 일허느라고 했고 추진허는 사람들은 추진허는 사람 나름대로 자꾸 사정해서, 설득해가지고 내놓게 허느라고 추진허는 사람도 욕봤지.”
  1970년대, 농촌을 개발한다는 목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 흙길이 시멘트길로 바뀌었다. 그때는 마땅한 기계가 없어 마을 사람들의 일손을 동원해, 손과 삽으로 일일이 시멘트를 발랐다. 며칠이면 새 길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 아스팔트가 새롭게 덧씌워졌으나, 여전히 하대마을 안길은 고불고불한 모양이 그대로 남아있다. 산 아래부터 산꼭대기까지 뻗어있는 이 길에는 마을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서려있다.
  농사 100년
  “옛날에는 소 쟁기로 논 갈고 밭 갈고 그랬었지. 그러고 농로 맨들고서 리어카가 생겼어, 손으로 끌고 댕기는 리어카. 그 후로 마차라고, 소로 끌는 우마차 있잖여. 타이어로 바퀴 허고 나무로 맨들어서 소가 끌고 대니고. 그런 거 허다가 인저 회전기라고 발로 눌러서 벼 터는 게 있어. 벼 묶은 걸 한 주먹씩 끌러가지고서 거기다 대믄 벼 나락이 다 털어지거든? 그렇게 허다가 연대는 기억은 안 나는디, 보리 바심할 적이 자리개라고서 절구통이라고 있어. 거기다 투드렸거든. 그렇게 보리 바심허고 안 털어지니께 나머지는 도르캐(도리깨)로 두드리고. 그렇게 농사짓다가 얼마 있으니께 발동기라고 있잖어, 밟는 물건. 그게 5마력이라고 쪼그만혀. 아무나 지도(들지) 못허지만 짱짱한 사람은 그거 져. 분해해가지고 지고 대니면서 논에다 보리 갈고(심고) 그랬거든? 논이 질으믄 보리 못 갈지만, 건답이라고 마른 논에서 보리 갈고 그랬지. 거기 가서 발동기를 분해했지만서도 지고 가서 보리 타작허고 그랬지. 그렇게 허다가 인저 보리는 안 갈고 벼만 했는디, 그 후로 경운기 생기고 이앙기 생기고... 이앙기도 처음엔 손으로 밀고 대니는 거였는디 그거 몇 해 허다가 지끔처럼 승용이앙기 생긴겨. 나도 처음부텀 끝까지 온 거여(웃음).
  처음에는 모심는데도 손으로 심었거든? 그랬는디 그 후로 기계로 모심고 그러잖어. 벼 비는(베는) 것도 손으로 벼서 요기 논둑에다 쭉 세워났거든? 2주 동안 세워놓으믄 다 말러. 그래서 볏단을 지게로 져다가 털었지. 장정은 한 4~50단 져, 기운 센 사람은. 난 그렇겐 못 졌는디, 나도 한 30단 졌어.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아주 온 거여. 앞으로 어떻게 될라나는 모르겄지만서도 그렇게 발전됐어. 그러니께 처음부터 끝까지 발전된 과정을 다 거친 속이지.”
  조병국 할아버지가 팔십 년 가까이 살아온 집과 농사지어온 밭. 이 밭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사람 발자국, 소 발자국, 리어카의 바퀴자국, 경운기의 바퀴자국... 이곳을 드나들었던 그 모든 흔적들이 쌓여왔을 것이다.
  조병국 할아버지의 몸에 깊게 새겨져있는 주름만큼이나 굴곡진 세월의 이야기들은 끝이 없었다. “잉, 내가 나이가 제일 많댜(웃음).” 하고 웃으며 이야기해주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왠지 모를 쓸쓸함과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구항면에서 함께 모임을 하던 동갑내기 친구들도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활기찼던 마을의 풍경도 점점 사람이 줄어 허전하기만 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자꾸만 빈자리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무언가를 심고 밭을 정리한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묵묵함으로 할아버지는 고집스러운 시간들을 견뎌왔을 것이다.
   언제 봐도 반갑고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 그대로, 건강하게 오래오래 하대마을의 첫 집을 지켜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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