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서천군 화양면 월산리(月山里)
[지명유래] 서천군 화양면 월산리(月山里)
  • 류신 기자
  • 승인 2021.09.16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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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백제시대 마산현 지역이었다. 신라시대는 가림군의 영현인 마산현 소속이었고, 고려때 임천의 한산현 소속이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 한산군에 속했고, 조선 말 한산군 동하면 소속이었으며, 달고개 아래라 해서 달고개 또는 월령(月嶺)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령리, 신천리, 광생리 일부를 합쳐 월산리라 해서 서천군 화양면에 편입되었다.

옛날 마을에 방죽이 있을 당시 그 방죽을 중심으로 방죽건너, 방죽 안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고, 소나무 밭 너머에 자리 잡은 솔너머라 부르는 지역과 월령 남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신촌이라 하며, 솔너머 북쪽에 있는 마을을 월령 또는 달고개라 한다.

월령 양지쪽에 있는 마을을 양지편이라 하고, 월산리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은 응지편이라 한다.

방죽건너라고 하는 지역에서 북쪽 구동리로 넘어가는 길을 장승백이라 하는데, 이곳에 옛날 장승이 서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이 마을에는 8․15 해방 전에 우물이 한 곳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 연유는 우물을 여러 곳 파게 되면 달이 분산된다 해서 마을 어른들이 다른 우물을 파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월산리에는 1915년경부터 20년 동안 2년제 양학당을 만들어 양재관, 김양배, 권병천, 서준식, 양지환 씨 등이 한문과 한글, 수학 등을 무료로 가르쳐 주민들이 일찍부터 신학문을 깨우쳤다 하며, 이는 1935년경 주변에 학교가 생기자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현재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달고개모시마을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외지 관광객이 마을 소득에 보탬을 주고 있다. 이 마을에는 ‘비명에 산 톱골의 장사’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소개한다. 옛날 고려시대 금강이 흐르는 월산리에 한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기운이 장사 일 뿐만 아니라 축지법을 썼는데, 그의 손에 잡히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한다. 그가 장사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고을 원님에게 알려졌고, 원님은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마을에 왔다. 마을 앞에서 장사는 어느 스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님이 가기를 기다려 장사를 만난 원님은 장사와 내기를 걸었다. 내기 인즉, 원님이 목수 열 사람을 시켜 집을 짓는데 이 집이 완성되기 전에 장사가 돌아오면 그 집을 장사에게 줄 것이지만,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 신상에 해로울 것이라는 조건이었다. 장사는 선뜻 대답하고 원님의 편지를 받아 한양 사직골 김대감댁에 갖다 주고 답장을 받아오기로 했다. 똑같은 시간에 목수들과 일을 시작한 그는 목수들이 집을 짓기 위해 마당에 목재를 내려놓을 시간 벌써 한양에 도착했다. 김대감에게 편지를 전하자 김대감은 장사를 보며 ‘이 놈은 장차 크게 반역할 놈이다.’라고 생각하고는 답장에 ‘즉시 죽여버려라’라는 글을 써서 그에게 주었다. 그는 편지를 받아 들고 김대감 집을 나오는데 지난번 마을에서 만났던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장사를 보고, “여보시오. 집에 가거든 궤짝과 톱을 주의하시오. 밑창을 뚫으면 허공일거요”라고 말한 후 사라졌다. 장사가 스님과 헤어져 축지법을 써서 단숨에 마을에 돌아오니 목수들은 그제야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원님에게 가서 그 편지를 전했다. 편지를 읽은 원님은 “여봐라, 이놈을 당장에 포박하라”하고 명령을 내렸다. 포박을 당한 장사를 보고 원님은 “너는 장차 크게 역모를 꾀할 놈이니 죽어 마땅하다”고 하며, 궤짝에 들어가게 하고 궤짝 위에 못질을 하더니 목수를 시켜 큰 톱을 가져오게 한 후 “저 궤짝을 썰어 저놈을 두 토막을 내어 죽이렸다”하고 명령했다. 궤짝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장사는 그제야 한양 김대감집 앞에서 만남 스님이 하던 말을 생각하고 몸에 힘을 주니 밧줄이 끓어졌다. 그는 온힘을 다해 궤짝 아래를 밀치니 밑창이 뚫어지면서 땅속으로 떨어졌다. 땅속에 떨어져 위를 보니 궤짝을 써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땅속으로 한참 가다 위를 올려다보니 바로 그 곳에 원님의 수레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수레 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원님은 톱으로 궤짝을 썰었으나 장사가 없어진 것 을 발견하고 그를 잡으라고 소리 지르며 수레에 다가가 앉으려고 하자 장사는 발로 그를 힘껏 찼다. 하늘로 붕 떴다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원님은 사람 살리라고 소리 질렀다. 장사는 원님을 보고 “사람을 톱으로 썰어 죽이려고 하다니 내가 무슨 죄가 있소. 힘이 장사 인 것도 죄요?”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장사는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과 벗하며 살았다 한다. 따라서 장사를 톱으로 죽이려고 하던 장소를 톱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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