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마을 이야기] 장곡면 월계1리(1)
[홍성군 마을 이야기] 장곡면 월계1리(1)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09.2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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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농사2

  농지를 이어가는 젊은 농부들
  마을의 20년, 30년 후를 준비한다.
  돌아온 마을 일꾼 오우식 이장님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저 위(서울)에서 다녔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할아버지 그런 분들이 (너희들은)배우라고 유학을 보낸 거죠. 결론은 39년 만에 여기로 내려왔어요.” (오우식, 60세)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은 지 13년 차라는 오우식님은 10년은 더 일찍 내려왔어야 했다고 말씀하신다. 
  “어느 마을이던 간에 몸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게 잘 되고. 앞으론 외지에서 (사람이)안 들어오면 이 자체 인구 가지고는 안돼. 이걸(농지) 이어받을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70대, 80대 자제분들인데 과연 자제분들이 여기 와서 (농사)할 사람이 있을까. 이게 궁금증이죠. 과연 20년 후에는 마을 자체가 존재가 될 거냐 이게 문제지.”
  마을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농지를 이어갈 새로운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은 마을 차원의 이해와 공감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이해가 마을에 형성되기 바라는 오우식님은 젊은 사람들이 유입될 수 있는 공동작업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을에 실질적인 생산력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 마을이 지속되고 발전되기를 꿈꾸고 있다. 
  오우식님의 농사는 논농사와 밭농사이다. 벼를 생산하고 봄에는 감자, 가을에는 단무지를 심어 소득을 얻고 있다.
  식물의 마음을 아는, 실천하는 농부와 야채의 여왕
  유태용· 박복실 부부
  천지원 농장의 유태용님은 노지에 심은 가지를 뽑고 겨울 농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가지는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있었다. 가지가 높게 자란 것이 농사를 잘 지어서인 줄 알았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농사 지어가메 작물한테 욕먹는 거에유. 나는(가지) 이렇게 넓게 공간을 확보해서 자기꺼(열매)를 열어 줄텐디 바짝 묶어 놨으니까. 나(가지) 죽일라고, 심어놓고 속 썩이는 거 밖에 더 돼요. 그렇자네 얼마나 괴로웠을겨 이렇게 바짝 묶어놔서.”
  농부의 투박하게 내뱉는 말속에 작물을 향한 마음이 가득하다. 천지원 농장은 친환경 농사를 10년 지어오다 한계를 느끼고 작년 10월 그만두었다. 인터뷰 내내 이에 대한 속상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듣는 사람도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유기인증은 포기했지만 천지원 농장은 여전히 약을 잘 치지 않는다. 인증과 관계없이 자신의 신조로 농사짓는 농부는 이렇게 말한다.
  “(친환경농업에 대해서)사상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해도 정부에서 그걸 뒷받침해줘야 움직여지는 거지. 생산비나 모든 게 학문적인 거는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직접 실천을 해야 뭔가 이뤄지고 마무리가 되는 거지. 농사는 열심히 한 만큼 댓가가 나오는 거에유. 그런데 학문도 필요한 거에요.”
  10년 전 월계1리에 터를 잡은 박복실님은 중국 하얼빈 출신이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천지원 농장의 작물은 담배에서 남방 계열 특수 채소로 작목전환 되었다. 박복실님의 또 다른 이름은 야채의 여왕이다. 요즘은 매운 아삭이 고추 수확이 한창이다. 매운 아삭이 역시 남방 계열 고추이다. 정직하게 농사짓고 노력하는 농부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어때 (비닐하우스에)와 보니까는. 나는 다른데 안 가봤어. 여기 다 3중이야. 올해는 커텐을(겨울철 방한부직포)해봤어. 다 자동으로 되어 있어(비닐하우스 자동 환기). 자동으로 온도 맞춰놔서 환기가 되고 온풍기도 다 있잖아.”
  겨울철 남방 계열 작물 재배를 위한 농사 시설이 많이 있었다. 겨울 농사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만 판매에는 반영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농부의 정성에 작물들은 열매로 돌려줄 것이다.
  “올 처음으로 환풍기도 가세한 거야. 온도 5도나 잡아준다고 그래가지고. 느낌도 틀려. 똑같은 온도라도 여기는 찬바람이 안 들고 그 온도에 그대로 있으니까는 얼굴이 뜨뜻해. 올해 많이 벌어야 하는데. 야 너네 많이 열려라 내 집 짓게~. 안 그래도 꽃이 다닥다닥해서 많이 땄어 여기서.”
  천지원 농장의 탯줄
  오정순 어머님의 바지런한 손
  오정순님은 월계1리에서 태어나고 자라 23세에 금당리 유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결혼 후 1년간 금당리에서 살다 정미소를 운영하는 고향집으로 남편과 함께 돌아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지금은 아들인 유태용님, 며느리 박복실님과 함께 천지원 농장을 돌보는 바지런한 손으로 활약하고 계신다. 옛 정미소는 현재 충절로가 개통된 자리에 있었다. 쌀농사가 중요하던 그 시절에 정미소는 한국 근대 농업 발달의 견인차이자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방아 찧는 정미소는 근방의 곡식과 사람 소식이 모이는 곳이었다.
  “가 근방 마을 사람들이 찧으러 오니께 그거 받아 찧었지. 저쪽 2구는 산밭굴이라고 지정리, 거기께 있으니께 글루 가고. 요기는 저 예산에서도 왔지. 여 아래가 예산이니께. 요기 1구, 2구 이제 왔지.”
  (오정순님 댁 정미소는 월계1구와 2구, 예산지역 사람들이 이용했다. 월계 2구와 예산에서 오는 경우는 월계1구 가까이 자리한 타 행정리 주거구역의 주민들이었다.)
  1963년도에는 오정순님 아버지가 장곡면장에 취임한 해였다. 당시 면장 투표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저기 지정리 OOO씨라구 그 분하고 두 분이서 나와서 친정아버지가 합격을 하신겨. 면 단위로 투표를 하지. 투표를 허는 날 이제 투표소에 가. 그렇게 선출이 된 거지. ‘그 양반이가 되야겄다’ 그렇게 한 표라도 모이면 되는 거 아니여. 그랬지. 그때가 저기 박정희 대통령, 이제 정치가 바뀌어서 취임을 하셨지. 공화당 시절이.”
  비닐하우스를 구경시켜 주시던 오정순 어머님은 그동안 한참 안 들어와 봤다며 고랑을 훑어 풀을 뽑으신다. 한 칸, 한 칸 매의 눈으로 보고 풀을 뽑는 빈틈없는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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