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마을 이야기] 결성면 역촌마을
[홍성군 마을 이야기] 결성면 역촌마을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11.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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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곳곳에 숨어있는 옛 물건①
밀대방석과 가래.
밀대방석과 가래.

  내가 아까워서 다 이렇게 모아놨거든.
  김순월 씨
  역촌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이 마을에서 연애부터 결혼까지 한 1948년생 김순월 씨는 시어머니 때부터 가지고 온 옛 물건들을 잘 보관하고 있다. 또 한 명의 마을토박이로 평생을 역촌마을에서 살아온 1942년생 김동순 씨는 마을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고 말도 잘한다 하여 ‘역촌마을 변호사’라 불린다. 김동순 씨 또한 보관하고 있는 옛 물건들을 보여주면서 그 당시의 생활상, 물건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그 물건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동감 있게 풀어주었다.
  “우리 아저씨(남편 분) 친구가 해서 줬구만. 열 식구도 넘는 여러 식구가 앉아야 하니 이렇게 크지. 여름이면 마당에 쭉 펴놓고 모깃불 놓고 상 두 개 놓고 여기서 저녁 먹고 그랬지.”- 김동순 씨
  껍질이 매끄럽고 물이 잘 스미지 않는 왕골을 굵게 쪼개 엮어 만드는 왕골자리와 밀짚으로 두툼하게 엮어서 만드는 밀대방석은 여름철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생활용품이었다. 특히 밀대방석은 옥외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기계가 없던 옛날에는 짐을 얹어 운반할 수 있는 지게를 사용했다. 볏짚을 나르거나, 논밭에서 수확한 작물을 나르고, 산에서 나무를 해 나르는데 지게가 필수품이었다. 짐을 싣기 위해 지게에 얹는 부챗살 모양의 물건을 ‘발채’라 하는데 발채는 싸릿대를 촘촘하게 엮어 만들었다. 발채를 얹은 지게를 ‘바지게’라고 부른다. 
  김동순 씨는 “이거 어떤 아저씨가 싸리로 엮어줬어”라며 40여 년 됐다는 바지게를 직접 메고 무거운 짐을 싣는 몸짓을 해 보였다.
  고리버들 가지의 껍질을 벗겨 만드는 고리는 옛날에 오래 보관할 물건들을 넣어서 다락이나 선반 위에 올려 두기도 하고, 떡이나 옷 등을 담아 이동할 때 머리에 이고 다니던 옛날 민속 바구니를 말한다. 또 혼사나 제사 등의 큰일에 떡을 담는 그릇으로도 활용했다. 형태에 따라 동그랗게 생긴 것을 동고리라 하고 약간 모난 것을 모재비라고 한다.
  “옛날에 이거 보고 고리짝이라고 그랬는데 시어머니가 시집올 때 뭐 담아서 가져온 거 같더라고.”- 김순월 씨
  “각시가 시집을 가믄 음식을 잔뜩 차려서 각시 앞에다 상 해주고 여기다 그걸 다 싸서 가마니다 해서 딸려서 가마타구 지고 왔지.”
  -김동순 씨
  우리나라에서는 처녀들이 시집갈 때 동고리를 혼구의 하나로 장만하는 풍습이 있었다. 시집 간 새색시가 친정집에 갈 때는 동고리에 떡과 엿을 담아 친정에 드렸고, 돌아올 때에 역시 시부모에게도 떡과 엿을 담아가지고 왔다고 한다. 고리는 아래 위 두 짝으로 되어 닫을 수 있게 되어있다. 가는 고리버들 가지를 촘촘히 엮어 그릇 형태를 잡아 놓고, 변두리에 넓고 얇게 켠 소나무를 안팎으로 대어 네 곳을 솔뿌리로 꿰매어 고정한다. 이때 위짝을 아래짝보다 조금 크게 만들어서 아래짝을 깊이 덮어씌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특히 바닥을 촘촘하게 엮어서 담겨진 음식이 새지 않도록 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회관 앞에는 주민들이 식수를 얻기 위해 사용했던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회관 앞 주차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샘을 메꿨다고 한다.
  “물이 참 좋았어. 각시덜이 일찍 일어나서 보리쌀 씻으러 다 나와서 깨끗이 헹궈서 또 이고 가서 밥 하고 그랬지. 서로가 먼저 어떤 집 며느리가 제일 일찍 나오는지, 늦게 나오는지 비교하고 그랬어. 어떤 집 며느리는 늦게 일어난다느니 어쩐다 말이 있으니께 될 수 있으면 일찍 와서 빨리 헹궈 갖고 가는 거여.”- 김동순 씨
  샘물을 길러가기 위해 두레박을 사용했는데 그 기술 또한 쉽지 않았다. 물을 길러본 경험이 많지 않았던 김순월 씨는 “나는 그걸 헐 줄 몰라가지고 안 되어. 어떤 사람은 한 번에 착 하던데”라고 말한다.
  김동순 씨는 “그것도 기술이 필요해. 가운데가 끈이 달려 있으니께 두레박이 퍽 싸고 물이 퍼 져야 물 하나 가득 길러지는겨”라고 말한다. 
  물을 기르다 보면 두레박이 줄에서 끊어져 우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 두레박 건지는 쇠고리를 가지고 있는 집에서 빌려 두레박을 건지곤 했다. 김동순 씨는 “퐁당 빠져. 툼벙 빠지는 거야. 아이고, 또 빠졌다”라고 말하며 그 당시 우물 샘 풍경을 실감나게 이야기해줬다.
김순월 씨는 시어머니가 쓰던 키를 보관하고 있어서 “시어머니가 쓰던 거, 난 저런 거 하나 샀간?”이라며 보여줬다. 키는 곡식 따위를 담고 까불러서 쭉정이, 검부러기 등의 불순물을 제거하는데 사용했던 농기구다. 
  김동순 씨는 “이거 도고통에다 도고대로 찧구서 여기다 인제 곡식을 까불르면 껍질이 다 나가구 알맹이만 남는다구”라고 말하며 키는 버들로 만들어진 버들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열 되가 한 말. 그전에 우리들이 곡식 갖고 시장으로 팔러 가면은 말로 되 주고서 긁어지는 거는 말강구가 먹어. 거기로 가믄 말에다 붓구서 탁 긁어. 흘리는 거는 긁는 이가 갖는겨. 우리 어렸을 때 결성장 설 때 말강구라고 아주 고약한 할아버지가 있었어. 그게 면내에서 말강구 하라고 뭘 줬을겨. 긁어서 먹는 거. 그것도 감투를 썼으니께 먹었겠지. 얼마나 독 긁었다고 그놈의 할아배. 그이는 그게 품삯이었던 것 같아.”- 김동순 씨
  이명재의 ‘속 터지는 충청말(https://blog.naver.com/ymj621014/221442139226)’에 기록된 말강구 이야기에 따르면 말강구는 마질(곡식이나 가루 따위를 말로 되어 헤아리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숙련된 마질로 곡물을 사들이고 곡물을 팔았다. 말강구의 마질에는 ‘절대 손해 보는 마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말강구는 재빠른 손놀림과 눈속임으로 말을 속인다. 말강구가 사용하는 말은 곡식을 팔 때와 사들일 때가 다르다. 팔 때 쓰는 말은 겉으로 보면 똑같은데 들어가는 양이 모자라다. 사들일 때 쓰는 말은 반대로 바닥이 깊게 패여 있어 부피가 크다. 바닥이 깊게 패여 있는데 새것이 아니라 오래 써온 헌 말로 바닥이 낡아 헤지고, 표 안 나게 긁어내 깊이가 깊어서 겉보긴 똑같은데 담기는 양은 넘친다. 곡식을 재는 방법도 달랐는데, 사들일 때의 마질은 곡식을 차곡차곡 담고 자 막대기를 말 가운데에 박고 휘휘 저어 곡식의 작은 알갱이가 빈틈없이 꽉 찬다. 팔 때는 반대로 살살 담고는 자 막대기로 말 위를 스윽 긁는다. 그 순간 헐렁하게 위에 차 있던 곡식 낟알들이 아래로 쏟아진다. 이런 까닭에 손해를 입는 것은 손님들이었지만,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싸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출처] 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블로그|작성자 홍성군 청년마을조사단(이은정, 주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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