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면 장촌마을-마을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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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11.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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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기억하다(1)
유영례 씨가 시집오기 전부터 시부모가 거주하고 있던 옛집으로 현재 유 씨가 거주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옛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유영례 씨가 시집오기 전부터 시부모가 거주하고 있던 옛집으로 현재 유 씨가 거주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옛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은하면 장곡리 장촌마을에는 유독 오래된 우리 옛집이 많이 있다. 족히 100년 이상 된 옛집의 황토 흙과 나무 기둥을 기본 구조로 유지한 채 대부분 입식부엌과 화장실을 개조해 거주하고 있다. 
  1925년생 유영례 씨는 서부면 이호리에서 스물두 살에 장촌마을로 시집을 왔다. 유영례 씨 집은 크게 위채와 아래채로 나눠진다. 위채에는 방 3개, 아래채에는 방이 2개가 있다. 집 뒤로는 대나무 숲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어 따뜻하다. 딸기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 대나무를 베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죽순을 캐어 음식으로 해 먹기도 했다. 
  “죽순은 지금 이맘때(6월)가 가장 좋아. 연한 놈으로 캐서 그걸 쪼개. 죽순이 좀 쓴맛이 나거든? 그래 물에 좀 담가 놔. 그래가지고 고기하고 볶아도 되고, 간간하게 무쳐서 먹어도 맛나지. 얼마 전에 캤는데 귀찮아서 지금 저기 그대로 놔뒀어.” 
시집을 오기 전부터 시댁 식구들이 거주했던 집이니 족히 200여 년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는 배나무가 탐스럽게 열매를 맺었다. 지난 홍성장날, 아들과 함께 장에서 배봉지를 사 와 달아줬다. 
  옛집의 대문은 모두 나무 대문이다. 이 나무대문에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들어가 있다. 옛말에 문이 크고 집이 작으면 헛되게 허비하는 것이 많고, 문이 작고 집이 크면 재산이 늘고 복이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네 문은 안으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을 밖으로 열면 복이 달아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반면 광이나 부엌과 같은 곳의 문은 바깥으로 열렸다. 그것은 좁은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게 활용하려는 지혜였다. 
  “새마을운동 당시에 나무대문을 바꿨지. 나무라 버리지 않고 창고에 쌓아두고 땔감으로 사용했지.”
위채 옆에는 유영례 씨 가족들의 식수를 책임지는 작은 우물이 있다. 
  “마을에서 공동 상수도 내기 전까지는 이 우물 물 먹었지. 지금도 물이 마르지는 않았어.”
  예로부터 집은 남쪽에 있어야 하고 부엌은 서쪽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동쪽은 남자이며 서쪽은 여자를 의미하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다. 또한 부엌은 난방과 취사를 겸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안방 쪽에 부뚜막을 만들고 여기에 솥을 걸어 음식을 했다. 부엌은 지단이나 마당보다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하는데 이는 마당에서 나는 먼지가 음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처럼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할 수 없었던 시절에 벽장과 찬장, 찬탁, 나락 뒤주와 들 뒤주가 부엌 옆에 자리한다. 벽장에는 찬거리를 보관하고 찬장에는 그릇을 보관한다. 찬탁(반찬을 얹어놓는 긴 탁자)에는 그 때 먹을 수 있는 반찬들을 얹어놓고 나락 뒤주에는 일 년 내 먹을 쌀을 보관한다. 들 뒤주에는 부엌에서 쓰일 살림살이들이 보관된다. 나락 뒤주는 부엌 옆에 위치하고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 뒤주가 위치한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장독대가 있다. 변변한 수도시설이 없었기에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음식을 장만했다. 
  현재 유영례 씨 집은 예전 부엌의 아궁이를 뜯어낸 곳을 좀 더 확장해 입식부엌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어 아궁이가 있던 곳을 제외하고는 예전 부엌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예전 부엌에는 선반을 만들어 살림살이에 사용되는 도구와 용기들을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각종 장류를 직접 담그는 유영례 씨 집 뒤안에는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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