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永募里)
[지명유래]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永募里)
  • 류신 기자
  • 승인 2022.01.1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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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리는 명당혈이 있고 산수와 자연경관이 수려한 마을로 3선 의원인 이긍규 의원의 출신지이며, 문헌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백제 때 마산현에 속했다가 신라시대 가림군의 영현인 마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한산현이었고 조선 말 한산군 서하면에 소속됐던 곳이다.

고려 때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영모암이 있음으로 영모암 또는 영모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숭정리 일부를 합하여 영모리라 해서 서천군 기산면에 편입되었다.

영모암을 중심으로 북쪽에 목은 이색의 묘가 있는 가지고개와 서쪽에 부처를 닮은 부처바위가 있고, 동남쪽으로 산성너머가 있는데 건지산성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불렀다 하며, 서북쪽으로 새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새뜸 또는 신기, 남쪽에 밤바위가 많았던 밤굴이 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또한 이 마을 아랫녘 입구 쪽에는 한산팔경에 숭정암송으로 나오는 숭정산이 있다. 마을 위쪽 깊숙한 산 밑에 명당으로 알려진 목은 영당, 목은 신도비가 있고 그 동편에 문헌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문헌서원은 조선 1594년(선조 27)에 창건했으며, 도 지정문화재 125호로 이곳에는 한산 이씨의 시조 이윤경의 현손인 이자성의 아들 이곡과 이색, 이종학, 이자, 이개, 이종덕 등의 현인이 배향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장판각에는 가정과 목은 선생의 문집 판각이 보존되어 있으며, 도 무형문화재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88년 보수공사를 마쳐 새롭게 단장되었으나 지난 91년 5월 15일 밤에 총 975매 중 목판 180여 본과 고서 70~80권을 도난당한 후 일부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문헌 서원은 인근 초, 중 고등학생들의 소풍지로도 알려져 있다.

마을에 효자 이종덕 효행비가 있으며, 영모리 산성, 영모암지가 있다.

마을에는 이울재 라는 고개가 있는데 서낭당 고개라고도 하며 옛날에 성황당이 있었다.

영모암 아래쪽 마을을 아래뜸이라 하고 밤굴 남쪽에 있는 지역을 숭정이라고 하는데,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숭정산이 명산으로 나오고 그 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며, 그로 인해 숭정이라고 한다고 전해진다. 염밤이라는 지역의 서쪽으로 넓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넓다 해서 광암이라고 부르고 남배라고도 한다. 따라서 마을도 남배라고 하며, 한산지방 금성 나씨의 시조 한림공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남은동 이라고 불렀고, 그 지명이 변해서 남배가 되었다고 한다.

영모리 산성은 건지산의 서남부에서 완만하게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형성된 150m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쌓여지고 능선의 서남 사면을 이용하여 후에 내쌓기를 한 산성으로 이중 산성이다. 지금은 2차 산성시 연결부분이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고 성 내부에 여러 개의 민묘가 있으며 와편 등이 산재해 있다. 효자 이종덕 효행비는 1961년에 건립되었으며, 한산 이씨 소유로 되어 있다. 목은 이색 선생의 아들인 종덕은 소년시절에 진사가 되고 약관에 과거에 오른 분으로 태조 이성계와 친밀한 사이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 화를 당하였고,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충효에 뛰어나고 그 부인 또한 효열을 갖춘 분이라 한다.

숭정사지는 숭정산 산록에 있으며 이 사지는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지는 약 2백여 평으로 평탄한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이 사지 하단에는 옹달샘이 있어 1992년 서천군에서 정비했다. 

사지 내에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기와편이 산재해 있으며, 자기편 역시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숭정사는 기록에 보면 조선 초에 건립되었다가 중기에 폐사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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