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 24회/ 4장 18세기에서 온 편지 (3)
[연재소설 19로탄] 24회/ 4장 18세기에서 온 편지 (3)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5.10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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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은 홍익동에 있었다. 왕십리 역사 앞에서 성동경찰서를 우회하여 수백 미터 정도 걷다보면 큰 사거리가 나오는데 그  근방에 있는 4층 하얀색 건물이 바로 한국바둑의 본산 한국기원이다. 한국기원은 이 땅의 어떤 예능 체육단체를 막론하고 가장 독특하고 특별한 '기구'라 할 수 있다. 국가의 보조금 없이 단 1년도 유지하기 힘든 국내의 예능 체육단체들이 태반인 실정에서 한국기원의 자립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기원은 국가의 보조 없이 바둑인들만이 모여 만든 자생적 기구로, 프로기사, 바둑팬 그리고 후원자들이 연간 수천억원의 작은 사회를 만들어 굴러가는 독특한 문화를 가추고 있다 할 것이다.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프로기사들과 팬 그리고 바둑TV는 물론 바둑신문, 잡지, 출판 등이 하나의 산업체계를 이루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예능분야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김산은 1층 로비에 있는 경비에게 인사를 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큰 대국실이 있는데 연구생리그전은 그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김선생님?"

"아이고, 오원장님 안녕하시죠?"

김산은 대국실 한쪽에 있는 대기실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김산을 알아보고 악수를 청하는 '오윤렬'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바둑도장의 원장이었다. 그의 도장은 해마다 한두 명의 프로를 배출하여 이 바닥에서는 명문도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도인이는 오늘 이기면 부가 있네요?"

오윤렬이 대기실 벽에 붙어 있는 리그전 대진표를 보며 말했다.

"성곤이가 워낙 강자라서요?"

김산도 대진표를 힐끔 보며 대답했다. '진성곤'은 연구생 1조의 최강자였다. 프로와 아마추어들이 모두 출전하는 세계대회의 본선에도 올랐던 기력의 소유자다. 진성곤은 그 대회의 예선에서 프로 세 명을 연속으로 꺾었고 그 중에는 세계대회를 우승한 타이틀홀더도 끼어 있었다. 그 정도의 출중한 실력자인 진성곤이 6승2패를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기원 연구생들의 실력이었다.

"성곤이도 2패가 있잖아요? 1조는 아무도 장담 못하죠. 그건 그렇고 김선생님?"

오윤렬이 대기실에 놓여 있는 일회용 커피를 타다 김산에게 주며 말했다.

"감사...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연구생제도 폐지공청회 아시지요?"

 오윤렬은 갑자기 연구생 폐지공청회를 물었다.

 "네에... 듣기는 했습니다만."

"저도 도장대표로 참석해 의견을 말했는데 김선생님은 학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쎄요? 저는 그 문제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요. 도인이가 연구생에 들어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아 특별한 애로사항도 느끼지 못했고요."

"하긴 그렇기도 하겠네요. 도인이는 부모 속을 덜 썩이는군요."

"네에?"

"연구생 부모들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도장 운영자인 저도 답답합니다."

오윤렬은 대화의 초점과 관계없는 반문을 했다. 김산의 적극적인 답변을 기대하다가 김이 빠진 모양이었다. 바둑도장들은 연구생 폐지 의견에 대체로 반대입장을 펼치는 분위기였다.

한국기원은 바둑영재들을 조기에 발굴하고 교육시켜 조기에 프로에 입단을 시키는 정책을 오래전부터 취해오고 있었다. 바둑계에는 조기교육과 조기입단이 일류프로 배출의 지름길이란 인식이 있었다. 그 인식하에 오랫동안 시행되어 온 제도 연구생제도였다.

연구생은 1조부터 6조까지(거기다 지방 연구생을 포함하면) 대략 120여 명이 매주 주말리그전을 벌여 조별 강등을 하면서 무한 경쟁을 하는 중이었다.  이들 중 입단자는 매년 4~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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