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 26회/ 4장 18세기에서 온 편지 (5)
[연재소설 19로탄] 26회/ 4장 18세기에서 온 편지 (5)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5.1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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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침묵이 흘렀다.

도인의 방은 방문이 굳게 닫힌 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밤 11시, 도인이 아직 잠들 시간은 아닌데도 불이 꺼져 있었다.

김산은 항상 이런 순간이 무기력했다. 아버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도인은 오늘 패를 추가해 5승4패로 입단과는 거리가 먼 처지가 되었다. 지난 1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순간이었다.

"휴!"

김산은 담배를 한 대 꺼내 문다. 창문을 열고 불꺼진 반대편 아파트를 바라본다. 오래전에 재개발이 확정된 5층 주공아파트였다. 5년전에 사별한 아내와 10년 넘게 살았던 공간이었다.

김산은 가방 안에서 지옥심이 준 간찰 복사본을 꺼내 바라보았다. 칼라 복사본이라 종이의 질감과 단정하게 날려 쓴 필체가 사실감 있게 전달되었다.


귀한 사람은 조상의 덕을 물려 받았고

천한 사람은 복을 못타고 나 가난하지민

공평하고 변함 없는 세상이치야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살아 가는 것

공연히 등급을 갈라

이 세상이 지옥이 되었구나.

이것이 무슨 소리냐? 눈내리는 날 기껏 기반명을 써 주었더니 겨우 이런 소리나 지껄이느냐? 바둑판을 들고 내시의 지시를 따르라. (주1)

-수진방 김가 입납.

서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정조의 글씨는 단정하고 힘이 있다. 그리고 지독한 초서는 피하는 체질인지라 어느 정도 초서에 눈을 뜬 사람이라면 비교적 쉽게 내용 파악을 할 수 있다. 김산은 간찰 한 쪽의 공간에 번역문을 쓰고 간찰을 책상 위에 놓았다.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김려라....?"

김산은 담배를 한 대 다시 꺼내 물고 창가로 가 바깥을 바라본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자갈밭 위로 소나가가 쏟아지는 소리 같았다. 하늘 위로 수많은 별들이 떠 있었다. 은하수가 선명했다.

"벌써 가을이구나."

김산은 담배를 깊게 빨아 들이고는 가을이 왔음을 독백했다.

"그리고 김려 이 사람이 이토록 수상한 인물이었나?"

김산은 피우던 담배를 재털이에 눌러 끄고 책장에서 한국사인물사전을 꺼내 김려를 찾았다.

(본관 연안(延安). 자 사정(士精). 호 담정(藫庭). 1791년(정조15) 생원이 되고, 이후 청암사(靑巖寺) ·봉원사(奉元寺) 등에서 독서하다가, 1797년 강이천(姜彛天)의 비어(飛語)사건에 연루되어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가난한 농어민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갖게 되어, 이것이 이후 그의 문학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그곳의 부기(府妓)와도 어울리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시를 지어, 필화(筆禍)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겉만 화려한 벌열(閥閱)보다 우수함을 강조하고 벌열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1799년 다시 필화를 당하였으며 이때 그의 저서가 대부분 분서(焚書)되는 화를 입었다. 1801년(순조1) 강이천 비어사건의 재조사에서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다시 진해(鎭海)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민들과 지내면서《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지었다.)


김산은 사전 속의 김려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정조의 간찰 속에 표출된 김려의 사상이 관심이 갔다. 왕조시대는 철저한 신분시대다. 신분은 곧 왕조이고 왕조는 신분인 것이 그 시대의 법칙이다. 신분은 사상보다도 상위 개념인 시대가 왕조시대인 것이다.

그런 시대를 살던 김려의 간찰 발언은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칫 역도로 몰리기 십상인 발언인 것이다.

주1) 정조간찰.

貴者承祖陰. 賤者稟薄祿. 絪縕化醇理. 均齊元不續. 爭奈缺陷界. 較似阿鼻獄.

其文何言乎 訪論碁銘而來雪夜 然以文吐說 負盤色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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