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서천군 화양면 화촌리(花村里)
[지명] 서천군 화양면 화촌리(花村里)
  • 류신 기자
  • 승인 2021.08.3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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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촌리는 행정리 화촌과 나율로 나뉘어져 있으며, 독립운동가 송기면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고려시대 임천에 속한 한산현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한산현에 소속되었고 조선 말 한산군 동하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어 고지말 또는 화촌이라 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나율리(羅栗里)를 합하여 화촌이라 하여 서천군 화양면에 편
입된 곳이다. 나율은 동아시 동쪽에 자라잡고 있으며, 지형이 밤송이가 벌어진 형태를 띠고 있다 하며, 신라시대 이 마을에 낙향한 선비가 밤나무를 심어 그 후 밤나무가 무성했던 마을이라 나율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한 밤 가지처럼 지조 있는 사람이 정착한 마을이라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화촌리에 고지말이라는 곳이 있는데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으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다. 따라서 마을이 꽃으로 덮여 지형이나 산형이 연꽃에 묻혔다는 데서 고지말 또는 화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율 서쪽에 있는 마을을 동아시라고 부르는데, 이는 백제시대 주류성에서 흘러온 백제 유민들이 성을 아쉽게 버리고 산형의 동쪽에 정착하여 이룩한 마을이라는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동아시 남쪽의 들을 만갯들이라고 한다. 옛날 조수가 밀려오는 갯가가 들로 변했다 해서 만갯들이라 지칭했으며, 동아시 옆에 새로 생긴 지역을 새뜸이라고 부른다.

독립운동가 송기면 선생은 1896년 1월 6일 화촌에서 태어나 기독교인으로 생활해오며, 평소 일본의 침략에 불만을 품고 대한 독립을 염원하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거사를 계획했다. 따라서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집에서 태극기 2백여 개를 만든다음 이튿날 교인 유성열, 이근호, 임학규를 방문하여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4월 29일 마산 신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거사일 동지들과 함께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갖고 장터에 나가 모여든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할 것을 역설했다. 마침내 2천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이자 송기면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장터를 행진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그 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1년 6월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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